

오래 전 어릴 때 보고 왜 이게 그렇게 대작인지 모르겠다 생각했던 영화이다. 지금 보니 그 유명한 말타며 여자를 낚아채는 장면이 제레미 아이언스의 젊을 때였고 페드로는 안토니오 반데라스였구나.
여전히 영화가 대작인지 모르겠다. 방금 소설을 다 읽고 봐서인지 영화에 화가 날만큼이다. 이 소설은 여성 중심으로 쓰여졌다는 게 큰 특징 중 하나인데 역시나 감독이 에스테반 중심으로 시선을 바꾸어 버렸다. 물론 감독이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좋다. 그런데 에스테반의 복잡한 성격을 잘 그린 것도 아니고 무뚝뚝한 꼰대쯤으로 단순화해버렸다. 아니 이럴 거면 왜 에스테반 중심으로 한 거야? 지독하리만치 포악하고 자기 성질을 자기가 못 이겨서 지팡이로 집안 살림을 다 부숴대며 길길이 날뛰고 또 나중에 후회하고 그때마다 심장이 위험할만치 뛰는데도 180 넘는 키에 아흔까지 살며 욕구가 탱천하는 건강한 영감탱이, 공포의 대상이면서 모두에게 미움받고 지독하게도 고독한, 증오스러우면서도 경멸하게 되고 그런데 왠지 짠한 에스테반의 느낌이 전혀 안 살아난다. 클라라와의 관계도 잘 그려지지 않아 에스테반의 심리가 잘 느껴지지 않고. 게다가 클라라. 이 영혼의 집 그 자체나 다름없는, 물리적인 집 뿐 아니라 이 소설의 시작과 끝,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에도 영향을 미치는 그녀 대신 영화에서는 에스테반이 중심이 되면서 중요한 축이 사라져버린 느낌이다. 그리고 도대체 왜 메릴 스트립이 이 역을 맡은 걸까. 큰 코의 말상에 덩치 크고 살집있는데다 관록있는 분위기를 가진 배우와 클라라는 너무 안 어울린다. 단순히 외모가 다른 게 아니라 몸짓과 표정 분위기 다 너무 다르다. 하긴 제레미 아이언스도 그렇지.
에스테반이 한 짓이나 군부가 한 짓들, 알바(여기선 블랑카)와 다른 여자들이 당한 고문 등을 너무나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것도 마음에 안 든다. 세상을 다 감싸는 듯한 클라라의 능력, 알바나 하이메가 했던 활동들, 트란시토 소토의 수완과 성공 같은 것도 하나도 안 그려놨다.
난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나름 다른 작품으로서 매력을 가지면 된다, 왜 꼭 원작을 살려야하나 라는 생각을 가진 편이라 소설과 영화 둘 다 좋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짜증이 날만큼 실망스럽다.
후에 덧붙임
이 영화는 원작에서 역사적인 부분과 줄거리만 잘 압축해서 따오는 걸 목표로 했나보다. 그러니까 ‘중심을 에스테반으로 바꾸고도 에스테반마저 잘 못그려냈다’가 아니라 중심이 역사적 줄거리인가보다. 하긴. 그러려면 성격들을 다 죽여야지. 다 너무 개성넘치고 다면적이어서 저런 압축된 줄거리에선 개연성없는 인물들오 보일 수 있겠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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